Reply Modify Delete Forward Prev Next Post List

  작성자   : 김의영 조회: 2552, 줄수: 1289, 분류: Etc.
네팔 여행기 1 부 입니다
내용이 좀 길어서...죄송합니다.

2003 년 5월 1일 <인천공항 --> 방콕 >


항상 혼자 어디론가 떠날 때마다 느꼈던 떠나기 싫은 마음이 극에 달했음을 느끼게 된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복잡했던 마음은 공의 상태에 이르러 버렸다. 좋음과 싫음, 떠남과 떠나지 않음의 경계선은 사라져 버렸다.

한숨도 눈을 부치지 못한 채 방콕의 돈무앙 공항에 도착해 버렸다.

공항 밖으로 나가자 축축하고 더운 공기가 가슴 속으로 쑥 들어와 버렸

다. 아..이것이 남국의 정취였구나 하는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나 버린다.

방콕에서 17시간을 기다린 후 나는 로얄 네팔 항공을 타고 네팔로 들어가

야만 했다. 공항에서 대기하기 시간이 너무 길어서 카오산 로드로 가기 위

해 공항 버스를 기다렸다. 한시간이 지났으나 버스는 올 생각도 하지 않

는 듯 했다. Information 에 물어보니 오늘은 공항버스가 운행하지 않는

날이라고 했다. 59번 버스를 타기 위해 배낭을 매고 걷기 시작했다.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으니 외국인 1명에 이어 2명이 더 나타났다. 그들에게 다

가가 카오산까지 택시비를 나누자고 하니 모두들 좋아했다. 사실 시내버스

는 배낭 매고 타기는 어려워 보였다. 카오산까지의 거리는 꽤나 멀었다.

카오산에 도착하니 밤 10시쯤 되었고 택시에서 내려 처음으로 바라본 카오

산 거리는 나의 상상을 초월하는 복잡하고 시끄럽고 흥겹고 피곤한 곳이었

다. 수 천 명의 외국인이 서로 몸을 부딪히지 않기 위해서 삼삼오오 여유

롭게 거니는 그 도로 가운데를 무거운 배낭 하나 매고 밤 늦은 시간에

guest house를 찾아 헤매는 것만으로도 그 시간은 내겐 참 힘겨운 시간이

었다. 강남역이나 이태원, 압구정동에 연말 12월 31일이나 크리스마스 이

브 때쯤 가면 이 정도 분위기가 나올까 싶었다.


인터넷에서 접했던 카오산 로드는 다만 여행자의 거리였었다. 어쩌면 터

키 이스탄불의 술타 나흐메트처럼 블루모스크와 아야 소피아 성당을 배경으

로 파란 잔디 위의 푸른 하늘이 있는 한가롭고 편안하지만 여행자를 위한

시설이 부족함 없고 쉴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왔던 내 생각이 틀렸음

을 택시에서 내리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혼자서 지내기에는 뭔가 외로움을 느끼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역시 나에

겐 인구 600 만 명의 거대한 도시는 어울리지 않는 듯 했다. 홍익인간이라

는 한국인 숙소에 자리를 잡고 피곤함에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내일이면

네팔의 카트만두로 가게된다. 카오산에 대한 자그마한 실망은 안나푸르나

와 네팔에 대한 갈증을 더해주고 있었다.




5월 2일 방콕에서 네팔로 가기


아침 7시에 일어나서 샤워를 하기 위해 옥상으로 올라갔다. 30여명이 묶

는 숙소에 샤워 부스는 오직 두 개 뿐이었다. 뜨거운 물은 나오지 않았으

나 별로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했다. 머리부터 젖어오는 차가운 기운에 기

분이 한결 나아짐을 느낀다. 나중에 네팔의 투어를 마치고 나면 다시 방콕

을 경유해서 캄보디아로 가야만 했다. 네팔 투어를 마치고 카오산에 돌아

올 때 미리 카오산의 지리와 식당 등을 알고 있으면 편할 거라는 생각에 서

둘러 카오산 로드를 둘러보고 와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길을 나서기 위

해 1층으로 내려오니 한국인 세명이 섬으로 2박 3일의 투어를 간다며 모

여 있었다. 그중 한 여자 아이는 태국이 이번에 3번째 이며 이번에는 6개

월 정도 체류 할 예정이라고 했다. 옆에 있는 남자는 인도 철학을 공부하

는 인도 유학생으로 귀국전 태국에 왔다는 인도 예찬론자로 안나 푸르나 라

운딩을 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떠날 때 두 손을 모아 내게

정중히 합장하는 것을 잊지 않고 갔다. 카오산의 지리를 지도와 함께 익

힌 후 태국의 쌀 국수인 꾸어우띠어우남을 시켜 먹었다. 900 원을 내고 먹

은 쌀 국수에는 국물 맛 뿐 아니라 쫄깃쫄깃한 국수와 국수 위에 올려진 고

명 맛이 일품이었다.


카오산 로드에서 공항으로 가기 위해 공항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매

15분마다 온다던 공항 버스는 벌써 50분 째 오지 않았다고 한 일본인 친구

가 말해 주었다. 몇몇 서양 사람들은 급히 택시를 잡아타고 공항으로 향해

버렸다. 그에게 택시를 나누어 타자고 하니 앞의 택시 기사는 300 바트를

불렀다. 공항 버스 요금이 100 바트 이니 초과 지출 하기는 싫었다. 각

각 100 씩을 내겠다고 하니 죽어도 125 이하는 안된다며 수백 달러에 이

르는 내 비행기표를 생각해 보란다. 나는 환히 웃으며 거절하고 지나가는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각각 100 밧을 내고 공항으로 가는 택시였

다. 공항으로 가는 길에 일본 사람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중국,

티벳,라오스,캄보디아,말레이지아,인도네시아,싱가폴,태국을 거쳐 이제 네

팔, 파키스탄을 거쳐 터키까지 육로로 여행중이라고 했다. 중간의 미얀마

가 국경이 막혀 네팔까지는 비행기로 가게 되어 있는데, 그는 나와 같은

비행기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8개월째 여행중이며 앞으로 3,4개월 정

도 돈이 다 될 때까지 여행을 할거라고 했다. 그의 자유스러움에 갑자기

우울해져버리기까지 했다.


아까까지 맑고 더운 날씨가 계속 될 것만 같았는데 갑자기 앞을 분간하

기 어려울 정도로 장대비가 쏟아진다. 스콜이다. 스콜을 보며 여기가 남국

임을 느낀다.


방콕의 구석 구석을 보지도 못하고 떠나는 것이 아쉽지만, 네팔의 안나푸

르나를 가슴에 담고 돌아올 때는 태국의 많은 부분을 가슴에 품으리라 결심

한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공항내의 스넥에 가서 꾸어이뚜어이남을 또 먹

었다. 카오산보다 여섯 배나 비싼 가격이었다.


보딩 시간이 다 되어 비행기를 기다렸으나 비행기는 한 시간이 넘도록 나

타나지도 않았다. 아무도 왜 늦냐고 항의하거나 초조해 하는 사람이 없

다. 늦게 오는 비행기를 기다리며, 네팔에서의 여행이 순탄치 못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두시간이나 늦게 나타난 네팔 항공을 타는데 네팔 의상을 입은 승무원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합장하며 인사를 건넨다. 나도 두 손을 모아 인사

를 건넨다. 두 손 모아 인사하는 것이 정성스럽고 겸손해 보여 마음에 들

었다. 네팔에 도착하거든 정중히 합장하는 인사의 예절을 배워야겠다는 생

각을 한다


(비행기 안에서)

이번 여행에서는 돈을 최대한 아끼기로 했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다

른 한국인 여행자들처럼 모험 삼아 거지 연습을 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

다. 여행지에 오면 소비 패턴은 당연히 현지 사정에 어울려야 하며 소비하

는 것 또한 나를 위한 것보다는 현지 지역을 위한 소비 구조가 되어야 한다

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먹고 즐기는 관광에 비해 소비가 줄게

되어 있는 것이다. 공갈치며 높은 가격을 부르는 상인이나 택시 기사에게

는 단호하겠지만 산 속 마을과 관광객의 발길이 좀처럼 닿지 않은 곳에서

의 지역 사람들과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소비는 아끼지 않으리라 결

심한다.


네팔 카트만두 공항에 도착하여 카트만두 라짐팟의 한국인 민박집으로 향했

다. 공항에서 라짐팟으로 가는 길에 본 카트만두의 모습은 참 마음에 든

다. 더럽고 좁고 냄새나고 사람들 북적거리고 동물과 자동차들은 아무렇게

나 다니고 있었다. 어렵게 도착한 장사장님 댁 라짐팟의 민박집은 조용하

고 분위기 좋은 곳이었다. 도착하여 산에 같이 가기로 한 이준이 형을 만

나고 장사장님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이 든다.



5/3 트레킹시작 <안나푸르나의 환영식>

새벽에 일어나서 포카라로 가기 위한 비행기를 타기 위해 카트만두 국내선

청사로 들어갔다. 시골 시외 버스 터미널 대합실 정도 되는 크기에 먼지

가 많아 어디 엉덩이를 대고 앉아 있기도 뭐하고 배낭을 내려놓기도 싫을

정도였다. 그런데 난 이런 분위기가 좋다. 역시 짐을 넣은 후 기다렸으나

비행기는 한 시간 이상 지연되고 있었다. 공항에서 발권을 마친 후 국내


선 항공을 탔다. 18인승의 프로펠러 비행기 안에 들어가면 내가 꼭 참치

통조림 속의 참치 살 부스러기가 된 느낌이다. 30분 후에 도착한 포카라에

서 마중 나온 포터와 함께 트레킹이 시작되는 페디로 향했다. 호젓한 시

골 분위기의 밝고 활기찬 느낌. 아름다운 시골길...참 마음에 드는 곳이로

구나 생각한다. 중간 중간에 만나는 작은 마을들과 티벳과 네팔 계통의 아

이들은 너무나 맑고 티 없는 모습이다. 트레킹이 시작되는 페디에 도착하

니 첫 번째 입구부터 가파른 언덕이다. 그것만 바라보기만 했는데도 가슴

이 마구 뛰고 있다. 페디를 출발하여 걸어 올라간다. 더운 날씨와 직접 내

리 쬐는 햇볕에 등은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버렸다. 두 시간 쯤 지났을까

첫 번째 마을인 담푸스가 나왔고 우리는 점심을 먹기로 했다. 달밧을 주

문 하였다. 안락미로 만든 쌀밥인 겢? 과 녹말을 갈아서 수프같이 만든 약

간의 카레 냄새가 나는 겢?, 그리고 야채를 소금과 식초를 넣고 절인 것

같은 떠르까리, 된장 같은 찌에가 나왔다. 정말 맛있었다.


<안나푸르나 여신의 성대한 환영식>

담푸스를 지나 오늘의 숙박 예정지인 포타나(1950m)로 향했다. 얼마쯤 걸

었을까. 멀리서부터 천둥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고 먼 곳의 하늘은 시꺼

먼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안나 푸르나 여신은 산을 오리기 시작한 나

를 환영하기 위해 작은 환영식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비가 올 것 같

아서 걸음을 서둘러 포타나로 향했다. 비가 쏟아지기 전에는 포타나의 산

장에 도착해야만 했다. 굵은 빗줄기가 간간히 이마 위에 떨어지곤 했다.

가방에서 우산을 꺼냄과 동시에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빗 줄기가 굵어지

더니 앞을 분간하지도 못할 정도로 포도알 만한 크기의 우박이 맹렬하게 쏟

아져 바닥에 나 뒹굴기 시작했다. 우산 안에 숨어 우산이 뚫어질 정도로

쏟아지는 우박과 앞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의 우박을 뚫고 5분 정도를 걸

어 올라갔다. 다행히도 포타나의 첫 번째 산장이 나타나 우리는 산장의 지

붕아래 우리 몸을 의지했다. 우박에 몇 대 얻어맞은 자리가 아팠다. 푸른

초원은 순식간에 눈이 내린 듯 하얗게 우박으로 덮여갔고 양철 지붕 위에

떨어지는 우박 소리는 마치 철길 옆에서 기차가 지나갈 때 들리는 소리와

같았다. 이곳은 맹렬히 우박이 쏟아지고 있는데 저 멀리 보이는 하늘에는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추며 저 멀리 보이는 마차푸차레의 봉우리가 흰눈이

덮인 채 밝은 금색으로 빛나며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황홀한 모습이었

다. 푸른 초원을 흰 눈같이 덮어버린 우박과 먼 곳의 마차푸차레, 그야말

로 성대한 안나 푸르나 여신의 환영식을 치른 셈이었다.



산장을 정한 후 짐을 풀고 포터, 인상적이었던 티벳인 캘상과 세시간 정

도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달밧과 밀크티를 마시며 캘상에게 한

국어를 두시간 정도 가르쳐 주었다. 그는 내가 여행중 만난 사람중에 가

장 노력하고 열심히 살고자 하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힌두어, 네팔어, 영

어, 티벳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한국어와 일본어를 배우고 싶어 했었다.

모든 티벳인이 그러하듯 그도 민족주의적 자존심이 대단했고 또한 민족을

위해 노력하고 정신적으로 대단히 성숙해 있는 사람이었다. 포터들과는 친

구가 되고 싶었지만, 이곳에는 내가 모르는 신분 질서가 있는 것 같았다.

지구상의 마지막 카스트 제도가 있는 국가인 이곳에서 나는 뭔지 모르는 벽

을 느껴가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다 평등한 친구인데, 그들은 내가 식사

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어디론가 사라져 식사를 하고 나타나곤 했

다. 모든 물건은 공손히 두 손으로 머리위로 건네곤 했다. 같이 온 형은

내게 그들은 내가 지시하는 모든 것을 지켜야만 하는 위치일 것이라고 귀뜸

해 주었으나 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들을 친구로 대해 주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지내리라 결심한다. 정말 한국에서는 상상하지도 못할 신분질서인

카스트였다. 조선시대의 양반과 그들의 사노비의 관계가 바로 지금은 포터

와 나의 관계이다. 나는 물론 그들을 돈으로 고용했지만, 20 킬로그램이

나 되는 내 짐을 지고 하루 종일 내가 건네는 물도 마시지 않은 채 높은 산

을 오르는 그들이 나는 걱정스럽고 고마울 뿐이다.


밤이 되니 점점 날이 추워지기 시작했다. 맹렬히 쏟아지는 비 소리를 들

으면 정신을 잃고 잠이 들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주변이 시끄러워

눈을 뜨니 빗소리와 우박 소리였다. 시계를 보니 밤 12시 30분. 밖으로

랜턴을 가지고 나가보니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고 지붕이 날아갈 듯 들썩들

썩 하고 깃발이 휘날려 깃대는 날아가 버릴 듯 위태로워 보였다. 이대로라

면 내일의 산행은 불가능하다. 어느덧 다시 잠이 들었으나 맹렬한 빗소리

는 밤새 계속 되었고 그 소리에 셀 수 없이 많이 잠을 설쳐댔다.


5/4 포타나->지누단다


새벽 다섯시 삼십 분에 일어나니 빗소리 대신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

왔다. 다행이다. 구름이 걷히고 저 멀리 마차푸차레 봉과 안나푸르나

south 가 그 위용을 드러냈다. 만년설로 뒤덮힌 채 떠오르는 해를 뒤로하

고 점차 반짝이는 은빛으로 봉우리가 변해간다. 앞으로 몇 일간 저 봉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걸어갈 생각을 하니 가슴이 벅차 온다. 트레킹 중 처음

으로 왜 사람들이 열심히 걸어 먼 이국 땅을 밟아 왔는지를 느끼게 된다.


포타나를 나와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향해 떠나던 도중 선생님 분위기

가 나는 네팔인이 우리를 앞질러 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와 방향이 같이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그가 정말로 선생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토르카라는 산골 마을의 선생님으로 선생님 13명, 어린이부터 고등학생까

지 200 명 정도 되는 학교의 선생님이라고 한다. 그의 집은 포카라 시내

에 있는데, 그는 금요일이 되면 이 산을 내려와 버스를 타고 포카라까지

가서 주말을 보낸 후 월요일이 되면 새벽에 산행을 시작해서 학교까지 출근

을 한다고 말해 주었다. 우리는 휴식을 하기 위해 멈추고 그는 수업을 위

해 학교로 갔다. 잠시 후에 학교에 우리가 도착하면 학교를 방문하기로 약

속을 하였다. 얼마를 걸었을까? 저 멀리 토르카가 나오고 학교 앞에서 오

지 마을 학교 돕는 기부금을 걷는 곳이 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200 루

피 정도를 기부했다. 학교에 가니 선생님이 반갑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

고 학교 소개를 해 주었다. 모나미 똑딱이 볼펜 한 다스를 선생님에게 드

리고 아이들과 함께 교실과 교정에서 사진을 찍었다. 산골 마을 학교이고

마감도 제대로 안된 허름한 벽에 둘러 쌓인 교실, 그리고 백묵으로 칠판

에 글씨를 쓰면 잘 지워지지도 않은 아주 낡은 칠판, 그리고 먼지가 자욱

한 의자와 책상에 앉아 있는 학생들이 있는 그 곳의 풍경은 마음 깊이 자

리 잡았다. 그래도 제법 학생들은 교복을 입고 똘망똘망한 눈 빛을 가지

고 교실에 모여 앉아 있었다.  유치원 교실에 가서 아이들 옆에 앉아 그

아이들을 보니 내게 감출 수 없는 환한 미소가 나옴을 느끼고 순간 그들을

좋아하고 아끼는 나를 느끼게 된다.


학교에서 잠시의 시간을 보낸 후 비시누샬마 선생님과 email주소를 교환

하고 선생님이 바라는 컴퓨터 공부를 위한 인터넷 자료 및 서적을 보내 주

기로 약속을 했다. 학교를 떠나 란드룩에 가서 점심 식사를 달밧으로 한

다. 오는 길에 보니 마늘 밭이 있어 허락을 받고 마늘을 뽑아 고추장에 찍

어 먹기도 했다. 오늘의 최종 목적지는 지누단다. 점심을 먹고 지누단다

를 향해 떠났다. 지누단다를 가는 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해야만 하

는 힘겨운 길이었다. 계곡의 아래로 내려가 계곡을 건넌 후 다시 산을 오

르고 다시 계곡을 만나면 그 계곡을 건너기 위해 계곡의 가장 아래 부분까

지 가서 다리를 통나무 다리를 건너야만 했다. 간신히 지누단다에 도착하

니 오후 다섯시. 지누단다에는 온천이 있었다. 계곡에서 용출되는 물이 뜨

거운 온천수 인데, 그 주변에 시멘트로 조그마한 욕조를 만들어 놓아서 물

을 받아 놓은 온천이었다. 온천물이 나오는 곳을 찾아 다시 계곡을 20여

분 내려간다. 열 명 정도의 현지인과 외국인이 목욕을 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지표 용출 온천수를 보니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슈레스라는 포터를

우연히 그곳에서 만났는데, 그는 우리 포터인 붓다와 절친한 친구 사이였

다. 슈레스는 우리가 숙박하는 산장을 잘 아는 듯 했고, 그는 우리를 위

해 숙박비를 공제해 주었지만, 그가 짐을 날라 주는 이스라엘 사람을 위해

서 그는 호의를 베풀지는 않았다. 나는 여행 내내 나의 포터인 붓다와 강

가에게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들도 우리의 인간적인 친근감에 감사하고

있었다. 슈레스는 자기의 친구인 붓다에게 우리가 해준 친절을 알고 있는

듯 우리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고 네팔의 술을 대접하기까지 했다. 슈레

스는 이스라엘 사람 3명의 배낭을 끈으로 묶어서 하나로 만든 후 혼자서

지고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까지 가고 있었다. 네팔인들이 가장 싫어하

는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들었던 적이 있었는데, 난 왜 그들이 이스

라엘 사람을 싫어하는지 알 것 같았다. 150 센티 미터 정도 되고 깡마른

슈레스는 혼자서 35 킬로 그램이 넘는 짐을 지고 있었으며 그의 일당은

짐 하나를 지고 가는 보통 포터의 일당과 같았다. 스팸을 굽고 소주와 함

께 달밧을 시켜 우리는 붓다와 강가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건너편 테이블의 슈레스가 부러운 듯 쳐다본다.



5/5 지누단다->촘롱->뱀부->도반

아침 여섯시에 일어나서 서둘러 짐을 꾸려 산행 준비를 한다. 어제 무리

를 해서 그런지 양쪽 종아리가 쑤시고 알이 생겼는데 자칫 하면 오늘 산행

에서 다리에 쥐가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누단다를 출발하여

촘롱(2300m)을 향해 간다. 지누단다에서 촘롱을 가는 길은 급경사가 계

속 되는 오르막 길이다. 잠시의 평지도 없는 아주 가파른 오르막을 두시

간 올라 옷이 땀으로 흠뻑 젖을 무렵 촘롱에 간신히 도착을 했다. 촘롱에

서 아침을 먹기 위해 한 롯지의 주방을 빌려 쓰기로 했다. 잘 마른 나무

에 불을 붙여 1년은 씻지 않았을 것 같은 냄비에 물을 담아 화덕 위에 올

려 물을 끓이고 맛있게 칼국수 3개를 끓여서 밥과 함께 포터들과 나누어

먹었다. 이곳은 해발 2300 미터의 오지 마을이다. 안나 푸르나를 가는 길

목에 있는 마을 중에는 가장 큰 마을이지만 차 길이 없어서 오직 걷지 않으

면 올 수 없는 곳이다. 난 이곳에서 한국으로 전화를 했다. 놀랍게도 이곳

에는 위성전화가 있었고 이곳을 지나면 이제 다시 이곳까지 돌아올 때까지

는 전화를 할 수 없었다. 사용료는 1분에 4800 원. 호기심에 1분을 사용

하기로 결정한 후 전화번호를 적어주니 곧 통화가 된다. 여보세요를 말하

자마자 스톱워치를 누른 아주머니는 매우 부담스러운 눈으로 시계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곤 했다. 57초 60 에 간신히 전화를 끊었다.

시누아(2340m)로 가는 길은 촘롱에서부터 2000 개의 계단을 내려가서 계

곡을 찍은 후 다시 그만큼의 오르막을 올라 거의 촘롱과 같은 고도까지 올

라가야만 했다. 제길.... 지도 상에 고도는 같은데 등고선을 보니 600 미

터 내려갔다가 다시 600 미터 올라가서 같았던 것이다. 가는 건 그렇지만

나중에 돌아올 때도 이 길로 올 걸 생각하니 막막했다. 촘롱에는 안나 푸

르나의 출입증을 검사하는 검사소가 있다. 가격은 2000 루피(32000원)이

다. 이 곳의 물가로 봤을 때 2000 루피는 네팔 일반 노동자 월급 보다 큰

돈이었다. 포터를 통해 들은 이야기로는 네팔 사람은 가이드 자격증이나

포터 자격증이 없으면 안나푸르나 체크 포인트 이상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니깐 이곳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외국인 관광객과

그 관광객을 돕는 가이드와 포터 뿐이었던 것이다. 이 아름다운 히말라야

의 자연을 가지고 사는 국민인 네팔 사람들은 정작 이곳을 구경할 수 없다

고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마음이 씁쓸했다. (그렇지만 네팔 사람들은 이곳

이 개방된다고 해도 오지 않을 것 같다)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로 가는 길은 산이 나오면 오르고 넘고, 오르면

다시 능선으로 내려가고 능선이 큰 협곡으로 끊어지면 협곡 아래 부분에 접

근이 가능한 지점까지 능선을 타고 가다가 혐곡 아래로 내려가서 계곡을 통

나무 다리로 건너고 다시 능선을 찾아 오르는 것을 반복하는 길이다. 오르

락 내리락 하고 걷는 것만을 생각한다면 고단하고 힘들 길이겠으나, 중간

중간에 만나는 멋진 경치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엿보며 가는 길은 한국에

서 느낄 수 없는 새로운 멋이 있다.


시누아를 지나 뱀부까지 가는 길에 만난 외국인들은 본인들은 마차푸차

레 베이스 캠프에서 내려오는 길인데 그곳에는 눈이 15센티미터나 있고 본

인들은 장비가 없어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가는 것을 포기했으나,

MBC도 무척 아름 답다고 말해 주었다. 뱀부(2430)에서 간단히 점심 식사

를 한 후 도반(2500)에 가서 하루를 묶었다. 뱀부에서 도반으로 가는 길

은 정글의 연속이었다. 협곡을 이루는 양 옆의 절벽에는 수 백 미터의 폭

포가 여러 곳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한국 같았으면 제법 이름도 하나씩

다 있고 대접 받을 만한 그런 봉우리와 폭포들이었지만, 이곳에선 이름도

없는 것들이다. 도반의 토티 롯지는 아담한 산장과 히말라야를 가르는 거

센 계곡을 끼고 있었고 협곡에서 떨어지는 폭포, 마차푸차르의 만년설이

보이는 곳이었다. 언젠가 스위스의 라우터 부르넨의 스토키 할머니 집에

서 본 것과 흡사했지만 이곳에는 스위스와 달리 인공적이지 않으면서 순수

한 자연이 느껴진다. 저녁때는 맥주 한잔과 함께 네팔 사람들, 프랑스 사

람들과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내 앞의 프랑스 인은 네팔산 고추

(청량고추보다 맵다)를 아무렇지도 않고 먹는 포터들과 나를 보더니 이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맵지 않냐고 하길래 매운 표정을 감추며 아주 아주 아

주 약간 매울지 모르겠지만, No problem 이라고 하니 그 프랑스인은 겁

도 없이 하나 덥석 먹었다. 밷지도 못하고 얼굴은 시뻘개져서 괴로워하며

기침을 하는 그를 보며 우리는 즐겁다. 낄낄낄... 꼴 좋다..난 프랑스 인

이 싫다.

도반의 고도는 해발 2510미터이다. 지도를 펴고 내일의 일정을 계산해 보

니 가능하면 마차푸차레 베이스 캠프까지 가야만 했다. MBC의 고도는

3800 미터. 따져 보면 내일 하루동안 자그마치 1300 미터나 고도를 올려

야 했다. 자칫 하면 고소로 인해 산행을 포기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내일의 컨디션을 살피기로 한 후 7000미터 사이의 고봉들 속에서 고이 잠

들었다.



5/6 도반->히말라야->데우랄리->마차푸차레

도반에서 출발하여 히말라야(2870) 으로 향했다. 중간 중간에 산사태가

일어난 곳과 눈사태가 일어난 구간을 지나 고도를 서서히 올린다. 어느 순

간부터 머리를 바늘로 살짝 지르는 것처럼 따끔거린다. 고소를 먹으면 안

된다. 마음속으로 비스떠리 비스떠리(천천히 천천히)를 생각한다. 뱀부에

서 히말라야에 이르는 정글과 협곡은 수 많은 폭포와 우렁차게 울리는 계

곡 소리, 저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와 눈, 간간이 지나가는 원주민들의 상

냥한 나마스테(안녕하세요)가 어울려져 내 가슴 속에는 아름다운 추억이

새겨지고 있었다. 히말라야에 도착해 따뜻한 햇볕 아래에서 밀크티와 스니

커즈를 먹는다. 나는 모든 음식과 차와 술은 모두 포터와 함께 했다. 나에

게 있어 이들의 카스트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나는 다만 여행객이다.나

는 여행객으로서 이들의 카스트를 보고 배우고 느끼기만 하면 그만인 것이

다. 또한 난 네팔 문화 속에 살고 있는 교민도 아니기 때문이다.  히말라

야를 출발하여 데우랄리(3200)로 향하는 길은 별다른 무리 없이 진행됐

다. 눈사태가 일어난 구간이 더 많아졌고 눈사태로 길이 끊어져 다른 길

을 만든 흔적도 찾을 수 있었다. 재수 없으면 저 위에 남아 있는 눈덩이들

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간간히 바늘로 머리

를 콕콕 찌르는 듯한 고산 증세가 나타날 때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쉼호


흡을 했다. 지난 밤에 산 위에는 눈이 많았는데 저 멀리 보이는 마차푸차

레 위의 눈이 많이 녹아버려서 아쉬운 마음이 들어 한마디 툭하고 내 밷는

다. 뭐야..시시하게!


데우랄리에서 점심을 먹고 두시간 정도 낮잠을 잤다. 한꺼번에 700 미터

나 되는 고도를 올려서 그런지 마음 한 구석에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현기증이 약간 나길래 고소의 현상인지 아닌지 생각하다가 잠

이 들었다.


몸의 상태가 좋지 않으면 데우랄리(3200)에서 하루를 머무르려고 했으나

컨디션을 보니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다가

고소가 심해지면 다시 되돌아 올 수도 있는 일이다. MBC로 가는 도중에 눈

이 한 두 송이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눈송이 하나 하나가 마치 구슬 아이

스크림의 알갱이와 똑같았다. MBC로 가던 도중 만난 하산하던 한국인 커플

은 MBC에서 큰 고산병으로 고생을 하고 밤새 토악질을 하다가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까지 두시간을 남겨두고 포기하고 내려가는 길이었는데 영 표정

이 좋아 보이질 않았다.


MBC로 가던 도중 한 두 송이씩 내리던 구슬 아이스크림 눈은 곧 폭설로

변해버렸다. 낮에 시시하다고 비웃은 내 말에 분노한 안나푸르나 여신은

분노의 폭설을 내려 붓고 있었다.


마차푸차레 베이스 캠프에 도착하여 산장을 정하고 휴식을 취하며 주변

을 돌아 보았다. 베이스 캠프를 병풍같이 수직으로 둘러싸고 있는 산사면

에 십여 곳 정도 흰 거품의 폭포가 떨어지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물이 떨어지는 폭포가 아니라 눈이 떨어지는 폭포였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천둥이 번쩍 할 때

주변의 산이 푸른 빛깔로 번쩍거리는데 그 모습에 보이는 설산의 봉우리들

이 웅장해 보인다. 오늘 걸어온 데우랄리 쪽으로 뒤를 돌아보니 5천 미터

급이 넘는 산이 양쪽으로 둘러싼 U 자 계곡이 보인다. 저 계곡을 따라 내

발자욱을 남겼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내가 살아온 인생의 길이 그 위에 오버

랩 되어 보이는 듯 하다. 폭포수 같이 쏟아지는 절벽의 눈 줄기와 깊은 협

곡, 병풍같이 늘어선 설산 앞에 서서 마차푸차레를 바라보니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 만 같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히말라야 고산 속의 협

곡 안에서 한 없이 겸손해 질 수밖에 없는 존재인 나를 느끼게 된다.

산소가 부족해서 그런지 잠시 숨을 멈추고 사진을 찍으려고 잠시 숨을 참

아도 힘들고 열심히 펜을 굴리며 일기를 쓰는 지금도 숨이 차서 힘이 든

다. 그리고 이곳의 기온은 우리나라 한 겨울의 스키장 같다. 어쨌든 신난

다.......집에 가기 싫다.


저녁 8시쯤 잠자리에 들어갔다. 몇 시간 쯤 지났을까? 갑자기 숨이 막혀

서 잠을 잘 수 가 없었다. 비닐봉지에 손가락으로 구멍을 세 개쯤 뚫은

후 그 비닐 봉지를 뒤집어쓰고 비닐 봉지를 묶어버리고 나면 숨이 찰 텐

데, 그 기분이 지금의 내 기분과 같지 않을까 생각했다.가뿐 숨을 세차게

몇 번 몰아서 쉬고 가슴을 주먹으로 두들기고 쥐어 뜯어도 숨이 모자라서

가슴이 답답했다. 옆을 보니 같이 자고 있던 이준이 형도 1분 간격으로 일

어섰다 누웠다를 반복하며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너무나 숨이 가뻐서 자

리에서 일어나 방에서 나와버렸다. 랜턴을 켜고 나왔다. 마치 백두산 천지

가 고봉들 사이로 동그랗게 물이 고여 있듯이, 베이스 캠프를 병풍같이 둥

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고봉들의 가운데로 고봉들에 동그랗게 잘린 하늘이

보이는데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별들이 보석같이 박혀 있다. 하늘에서 눈

을 떼지 못하고 잠시 사색에 잠겼으나, 곧 산소가 부족해 난 사색이 된

다. 새벽 3시까지 숨이 차서 한숨도 자지 못하면서 한 번 태어나서 한 번

은 죽겠지만, 죽더라도 숨막혀 죽는 일은 없어야겠다고 잠시 생각해 봤

다. ^^;




5/7 마차푸차레 BC ->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새벽 여섯시에 일어나니 숨을 쉬기가 무척 개운하다. 3800 미터 고도에는

적응이 된 것 같았다. 아침에 나와 보니 밤새 내리던 눈도 그치고 하늘에

는 구름 한점도 없이 주변의 설산이 보인다. 가까이서 보는 마차푸차레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다. 해가 비치지 않는 마차푸차레의 산사면에는 눈

이 코팅되어 반짝 반짝 빛나고 있었다. 밤새 눈이 많이 와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로 가는 길에는 무릎까지 눈이 쑥쑥 빠지는 곳도 많았다. 저멀

리 안나 푸르나 south 의 모습이 보이고 뒤를 돌아보니 마차푸차레의 신비

로운 모습이 보인다.

<순백의 옷을 입은 안나푸르나 여신>

2시간 정도를 눈 속에 푹푹 빠져가며 걸었다. 떠오르는 해에 비추인 안나

푸르나 south 는 눈부신 금색으로 변해가고 있다. 한 발 한 발 움직일 때

마다 숨이 차서 간간이 쉬어 가게 된다. 저 멀리 7000 미터가 넘는 고봉

여러개에 둘러 쌓인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가 보인다.


베이스 캠프에 도착하면 베이스 캠프는 온통 눈으로 둘러 쌓인 고봉들과 빙

하로 둘러 쌓여 있다. 안나푸르나의 한 롯지에서 밀크티와 만두를 시켜 아

침을 먹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에는 안나푸르나를 등정하다가 목숨

을 잃은 사람을 위로하는 위령 탑이 하나 있다. 위령탑이라고 해 봤자 주

변의 돌을 쌓아서 끈과 천으로 장식해 놓은 정도이다. 안나푸르나 롯지에

서 이번 트래킹의 처음부터 함께 여기까지 올라온 이준이형이 가방 속에서

이쁜 아기 사진을 꺼낸다. 1년전 어린이날 부모와 함께 놀이를 갔다가 오

는 길에 교통 사고가 나서 3일 만에 죽어 5월 7일에 죽었으니 오늘이 꼭 1

년이 된 날이었다. 꼭 1년전에 죽은 사랑하는 조카를 안나푸르나에서 보내

주기 위해 사진을 가져왔다며 형은 눈물을 보였다. 그 앞에 뭐라 할말이

없어서 자리를 나와 화장실 앞에가서 실컫 눈물을 흘렸다. 좋은 산에서 보

냈으니 행복하리라 생각하고 눈물을 거두었다. 사진과 쵸코렛을 가지고 위

령탑으로 향해 가서 형은 사진과 물과 쵸코렛을 놓고 잠시 묵념을 한 후 사

진을 태워 24개월 된 어린 아기를 죽은지 꼭 1년만에 ABC에서 하늘로 올

려 보낸다.


내려가는 길은 서둘러 가기로 했다. MBC를 지나 데우랄리로 내려가는 길

에 약간의 고산병 증세가 나타났고 걸음을 서둘러 히말라야를 지나 도반까

지 내려갔다. 올라온 길을 그대로 되돌아 내려간 셈이다.




5/8 닭잡아 먹은 촘롱

하루를 묵은 후 도반을 떠나 2000 개의 계단을 내려온 길을 다시 올라 촘

롱까지 갔다. 촘롱에 도착하여 전망이 좋은 산장을 잡았다. 오늘이 어버이

날인데 다행히도 전화가 있는 촘롱에 와서 집으로 전화를 했다. 엄마 아

빠 각각 1분씩 통화하고 10000원을 내고 딱 한마디 했다. 돈이 하나도 아

깝지 않네

윗 집에 가서 토종닭을 한 마리 잡아 목을 쳐서 속을 따내고 삼계탕을 해

먹었다. 붓다는 부인이 임신 9개월 째라서 살생을 할 수 없고 강가가 우리

를 위해 닭 목을 쳐 주었다.  우리 포터인 강가는 닭머리를 반으로 쪼개

숯불에 넣은 후 까맣게 탄 닭머리를 반으로 쪼개 으드득 으드득 씹어 먹더

니 마지막으로 닭벼슬을 쫄깃 쫄깃 씹어 먹어 버렸다.


포터는 포터로서의 일인 짐을 운반하는 일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

만, 그들은 우리를 위해 모든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손수 닭을 잡

고 목을 치고, 피를 뽑고, 내장을 꺼내 씻고, 지누단다에서는 도착한 후

에 휴식을 해도 되는 시간에 목욕을 하러 가는 우리를 위해 끝까지 동행해

주었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은 여행 내내 우리에게 친구 이상으로 아무 댓

가 없이 잘 해 주었다.


우리는 거의 마무리 되어 가는 트래킹을 생각하며 조촐한 파티를 함께 했

다. 닭 한 마리 그리고 달 밧을 시켜서 맥주 15캔과 함께 포터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붓다와 강가와 함께 했던 몇일 동안 난 그들의 삶

을 엿보고 싶었고 진지하게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어했다. 그들이 생각하

는 것, 그들이 가진 애환들, 그들이 사는 집, 가족들,소비 방식, 생활 방

식, 사고 방식 등 난 너무나 궁금한게 많았다. 그리고 관광 시즌이 끝난

다음의 이들의 삶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포터가 되기 위한 자격증을 따기 위해 드는 돈은 250 루피 (3200원), 가

이드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돈은 5000루피(8만원) 과 3개월의 정부 과정

훈련을 수료해야만 했다. 만약 내가 네팔에 남아 3개월 교육을 받고 5000

루피를 내면 가이드가 될 수 있느냐고 하니 가능할 것이라고 대답해 주었

다. 내가 what a simple! 이라고 하니 붓다는 내게 자신은 5000루피가

없어서 가이드가 될 수 없다고 내게는 simple 하지만 자신에게는 big

problem 이라고 푸념 섞인 말을 해 주었는데, 잠시 마음 한 구석에 서글

픈 아픔이 느껴진다. 붓다에게는 인생의 모습이 바뀔 수 있는 돈, 지금처

럼 4000미터가 넘는 고산을 20kg이 넘는 짐을 지지도 않고서도 지금보다

도 두 배의 일당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가이드 면허가 불과 8만원이 나에

게는 간단한 일이지만 그에게는 큰 문제가 되는 돈이었다.


훗날 네팔을 여행하면서 이곳의 한국인들의 체감 물가를 느꼈다. 오 천

루피는 4가족 1개월 생활비로 체감 물가상 우리 돈 200 만원 정도 되는 돈

이지만 붓다에게는 큰 돈인 것이다. 무슨 200 만원 현금이 없어서 가이드

가 되지 못하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200만원이 없어서 신용불량자가

되기 시작한 사람의 수가 삼 백 만명에 육박하는 대한민국의 상황을 되돌

아 보면 이곳에서의 현금 5000루피는 결코 작은 돈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왠지 연민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꼈지만 그의 앞에서 내색할 순 없다. 행

복의 무게를 잴 수 있는 추가 이 세상에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그의

행복과 나의 행복을 행복의 무게를 재는 양팔 저울에 재면 어느쪽으로 내려

갈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분명 그가 우리를 부러워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순간 나는 느끼고 있었다. 오늘밤 그 친구들에게 내가 해 줄 수 있

는 것은, 단지 내가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일 뿐이었다.

붓다는 포카라로 되돌아 가면 자신이 포카라 벨리의 관광을 가이드 해 주

겠다고 했다. 아무 댓가도 바라지 않고 자전거로 포카라 밸리의 모든 볼거

리를 안내하겠다고 했다. 참 고마운 일이었다. 우리는 포카라에서 그의 전

세방과 강가의 전세방을 방문하의 그들의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붓다의

안내로 포카라를 구경하기로 약속한다.


아직까지는 네팔 사회를 이해하기엔 내게 주어진 시간이 짧았다. 내가 만

난 붓다와 강가가 네팔의 최하 빈민층인지, 아니면 빈민층과 중산층의 사

이인지, 거의 중산층인지 나는 아직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동안 네팔

을 여행하며 느낀 것은 이곳에는 중산층이 없거나 아주 얇아 적당한 잣대

를 가지고 사회를 바라보는 것을 터득하기가 참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촘롱의 밤은 깊어만 가고 있었다.





5/9 네팔인의 소박한 삶을 보며 비레탄티로

촘롱을 떠나 계곡을 따라 내려갔다.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지름길을 찾

아 가로질러 내려간다. 12시쯤 되어서 나온 산장에서 라면을 끓여 먹는


다. 능선을 오르락 내리락 하지 않고 계곡 아래로 질러 가는 지름길이다.

우리도 모르던 새에 어느덧 고도는 1300 m 였다. New Bridge를 지나 비

레탄티로 향하는 지도상에 표시되지 않은 길은 트래커들이 많이 다니지 않

았던 것 같다. 네팔 사람들의 순수한 삶을 엿볼 수 있는 곳이었다. 베틀

에 양털 실을 만드는 할아버지, 드문 드문 나타나는 초가 지붕의 집, 초가

지붕 속에 있는 버팔로, 호미를 들고 밭에서 일하는 오린 소녀들, 먹이를

먹는 닭, 소쿠리를 엎어 놓아 그 속에 넣고 키우는 병아리들, 새끼양과 뛰

어노는 어린이들, 가파른 산 비탈에 계단식 논을 만들어 놓은 모습과 신발

도 없이 맨발로 험한 산을 사는 네팔인들의 삶의 중심을 통과해 내려온

다. 8시간쯤 걸어서 비레탄티에 내려와 River View 산장에 자리를 잡았

다. 이곳에서 트래킹이 끝나는 나야풀까지는 불과 걸어서 30분이었지만,

우리는 안나푸르나의 아쉬움을 간직하며 마지막 밤을 비레탄티에서 머무르

기로 했다. 이 롯지에는 전화도 있고 TV와 VTR과 VCD player 까지 있었

다.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우리는 저녁식사와 간단히 술을 마시기로

한 후 계곡가 옆의 자리에서 시간을 갖는다. 저녁 식사와 더불어 럭시라

는 술과 맥주를 나누고 있었고 산장의 마루에서는 마을 사람 몇몇이 텔레비

전을 보고 있었다. 붓다와 강가의 집에는 TV와 전화도 없다고 했다. 마을

에 전화가 한 개씩 있는데, 붓다가 사는 옆집에는 전화가 있어 가족과 통

화를 할 수 있으나 강가네집인 고르카에는 전화가 있는 집이 자기 집과 2

시간 떨어진 곳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트래킹 시즌인 9개월 동안 포카라

로 나와있는 강가는 가족들과 생사도 알 수 없는 듯 했다. 네팔 TV는 1개

의 채털과 16개의 인도 케이블 방송이 나오는데, 붓다와 강가는 TV가 너무

나 보고 싶었는지 우리와 함께 저녁을 먹는 동안에도 모든 신경이 TV가 있

는 마루로 집중해 있었다. 나는 부모님을 통해 들었던 1950년대 1960년대

의 삶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과거로의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밤에

는 모두 한자리에 모여 맥주와 럭시를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안녕 안나푸르나여...


5/10  트레킹 마감

비레탄티를 내려와 나야풀에서 드디어 트레킹을 모두 끝냈다. 버스를 타

고 포카라로 간 후 다시 택시를 타고 포카라의 레이크 사이드로 향했다.

중간에 붓다의 집에 잠시 들렀다. 그의 방은 아무렇게나 대충 칠해진 진

흙 벽에 침대가 세 개가 있었고 그 외에는 침대 하나가 들어갈 만한 공간

조차도 없었다. 남은 공간에는 캐로신 버너와 몇 개의 냄비가 있었고 그

의 아내는 만삭이 된 몸으로 요리를 하고 그의 3살난 딸은 진흙 바닥에 주

저 앉아 9일 만에 만난 아빠인 붓다를 보고도 별로 반가워 하지 않고 있

다. 붓다는 촘롱에서의 약속대로 9일만에 만난 가족을 뒤로 하고 우리를

자전거를 타고 하루 종일 땀을 뻘뻘 흘리며 우리를 가이드 해 주었다. 자

전거를 빌려 힌두교 사원들과 Devi's fall 과 cave를 구경했다. 저녁 때

는 이준이형, 강가, 붓다, 삼툭 아저씨(한국어를 하시는 마음씨 착한 가이

드)와 함께 김치하우스에서 삼겹살과 소주와 맥주를 마셨다. 붓다는 다행

히도 그 날 우리와 합석했던 어떤 한국인 아가씨와 내일 다시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로 떠나기로 했다.


<포카라에 대해서>

포카라는 무척 넓은 도시였다. 다만 여행자가 볼 수 있는 포카라는 레이

크 사이드와 댐 사이드의 관광객을 위한 거리 뿐이어서 자칫 하면 포카라

가 작은 도시라고 착각하기 쉬웠다. 포카라의 다운 타운으로 가면 네팔인

들의 삶을 엿볼 수 있었고 레이크 사이드와 댐사이드는 정말 여행자를 위

한 한적하고 편안한 곳이었다. 태국의 카오산 로드처럼 광적인 어지러움

이 있는 곳이 아니라 쉼과 마음의 평온을 찾고자 하는 여행자라면 포카라

의 레이크 사이드는 오래토록 머무를 수 있는 여행자의 거리라 생각한다.




5/11 강가와의 네팔 사람의 삶에 대한 이야기

이준이 형의 비행기가 결항되어 이준이 형은 하루 더 포카라에 머물러야

만 했다. 우리는 little tibetian guesthouse 로 자리를 옮겼다. 가

격 대비 만족도는 대단히 좋은 편이다. 숙소에서 나오다가 다시는 못 만나

리라고 생각했던 강가를 우연히 마주쳤다. 우리는 그의 삶이 궁금해져 그

의 방에 놀러갔다. 그의 방은 2,3평 남짓한 방에 아까전에 내린 폭우로 인

해 방에는 물이 들어와 있었고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방은 아무렇

게나 대충 칠해진 거친 벽면에 살림은 밥을 해 먹기 위한 캐로신 버너가 바

닥에 뒹굴고 냄비 한 개와 그릇 한 개,양념통 몇개, 그리고 덜그덕 거리

는 더러운 침대가 2개, 나일론 빨랫줄 2개가 전부였다.1983년에 아빠는

나를 교육하시기 위해 신림동 난곡에 데려가셨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그

보다 어렵지만 그보다 더 없이 행복한 표정의 한 청년의 삶을 보고 있었

다. 아마도 나는 내가 이런 집에 산다면 누군가가 우리집을 구경하고 싶다

고 했을 때 아마 집에 데리고 오지 않았을 것 같다.방에는 왕개미와 바퀴

벌레가 친근감있게 함께 살고 있었다. 강가는 내일 고향인 고르카로 오프

시즌인 3개월간 간다고 했다.

그와 네팔의 평민들의 삶과 물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네팔 사람의 삶과 물가>

강가가 사는 방은 좁고 더럽다. 보통 사람은 들어가서 어디 앉고 싶지 않

을 것 같은 그 방의 한달 렌트 비용은 1000루피(16000원)였고, 오프 시즌

동안 3개월동안 방을 비울 동안은 600루피로 할인을 받는다고 했다. 방을

빼 놓고 3개월 후 다시 방을 구하라고 했더니 강가는 3개월 후에 오면 이

방은 없을 것이고 다른 방을 구하려고 하면 집 주인들이 자기를 마오이스트

(공산주의자)로 생각하여 방을 아무도 내어 주지 않는다고 말해 주었다.

강가가 사는 고르카에는 마이오스트가 많아서 자신이 고르카 출신으로 포카

라에서 방을 구하기가 어렵다는 말이었다.



쌀 1 Kg 은 20 루피 (320원)
채소 1 Kg 은 15 루피
버팔로고기 1Kg 은 100 루피 (1600 원)
염소 고기 1Kg 은 300 루피  (4800원)
닭고기 1Kg 은 150 루피

강가의 집은 농사를 짓는 집으로 고르카에서 걸어서 두시간 들어가는 산 속

에 있었고 그의 집에는 ox 4, cow 9마리가 있다고 했다. 우리 나라 농촌

을 생각하고 너네집은 그래도 잘 사는 것 아니냐?고 물으니 환히 웃으며

가난하다고 말해 주었다.


소의 가격을 물어보니
버팔로는 13000 루피
암소는 2000 루피 (32000원)
수소는 5000 루피 (80000원)


5/12 포카라에서 룸비니로

새벽 6시에 일어나 룸비니를 가기 위해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준이 형

과 택시를 타고 버스 정류장에 가서 우리는 그간 함께 했던 여행에서 작별

을 했다. 룸비니로 가기 위해서는 바이와라 까지 가는 이 버스를 타고 가

서 바이와라에서 다시 1시간 30분 정도 로컬 버스를 타고 더 가야만 했

다. 미니 버스는 좁고 당연히 에어컨도 없었다. 미니 버스에는 중국계 말

레이시아 1명, 일본인 2명, 그리고 나 뿐이었다. 자리를 넓게 차지하고

바이와라까지 조금 편하게 가겠다 싶었다. 버스는 출발 후 여기 저기에서

사람을 태우기 시작하더니 포카라를 벗어나는데만 40분이 넘게 걸린다. 어

느 버스 정류장에서 사람들이 버스에 올라타는데 낯 익은 얼굴이다. 강가

가 고르카로 가기 위해 이 버스를 탄 것이다. 강가와 나는 반갑고 신기해

서 어쩔줄을 모른다. 이 버스는 고르카를 지나 바이와라까지 가는 버스였

던 것이다.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을 이렇게 우연히 만

날 수 있다는 것이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생각했다. 강가는 이 버스로 3시

간을 가서 로컬 버스로 갈아탄 후 다시 내려서 2시간을 걸어 간다고 했

다. 갑자기 강가를 따라 고르카에서 내려 강가네 집에서 몇일 농사일이나

도우면서 지내고 싶어졌다. 소몰이, 농사일을 도우며 사실 난 네팔 사람들

이 사는 모습을 더 가까이서 지켜보고 함께 동참해 보고 싶었다. 현지인들

의 삶을 보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좋은 경치와 재미있는 레져보다도 더 좋

은 경험이 된 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망설임 끝에 고르카에서 내리는 강가

를 뒤따라 내리지는 않았다.8시만에 도착한 바이와라는 인도를 넘어 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네팔의 떼러이 지방이었다. 살인적으로 덥다. 바이와라

에서 물어 물어 룸비니행 로컬 버스를 간신히 잡는다. 내 생애에 타 본 버

스 중에 가장 낙후된 버스였다. 가방을 내려 놓고 폭이 30센티 미터 정도

되는 의자에 앉으니 의자가 뒤로 발랑 넘어간다. 윽! 버스 안에서 돈을 받

는 차장 아이가 휘파람을 불면 버스가 멈추고 사람이 내리는가 하면 사람

이 모두 내리면 버스 철판을 주먹으로 쾅쾅 두들겨 다시 버스를 출발시켰

다. 두시간을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온 룸비니는 만감을 교차하게 하는

마을이었다. 론니 플래닛에 나온 Lumbini is not city. 라는 말이 무

슨 뜻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룸비니는 코카 콜라를 파는 구멍 가게 세

개, 그리고 밥 먹을 수 있는 레스토랑 두 개, 그리고 초가지붕과 흙으로

된 마을과 부처님이 태어난 유적지로 구성된 아주 간단한 마을이었다. 마

을이 있는 곳은 걸어서 5분 정도면 마을의 끝까지 모두 볼 수 있는 아담

한 곳이다. 거의 모든 건물의 지붕이 초가지붕, 벽은 흙과 대나무로 엮어

져 있다. 마치 민속촌에 와 있는 기분이다. 먼지가 피어오르지 않게 하기

위해 사람들이 집 앞에 나와 물을 뿌리는가 하면, 모든 사람들이 더위 아

래 축 늘어져 있다. 기온이 40도는 되는 것 같다. 룸비니에 오면 인터넷

도 하고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빌려 산책도 하려고 했던 생각이 룸비니에 내

리는 순간 불가능한 생각이었음을 알게 해 주었다. 관광객은 오로지 나 하

나 뿐이고 인도인처럼 생긴 아리안 족의 원주민들은 짙은 선그라스에 모자

를 쓴 나를 신가한 동물 쳐다보듯이 쳐다보며 자기들끼리 뭐라 뭐라 말한

다. 마을 안에 머물고 싶지만 나 홀로 이방인이 된 듯한 느낌 때문에 한국

인 절인 대성 석가사로 향했다. 대성 석가사에 가서 3명이 잘 수 있는 방

에 화장실과 낡은 선풍기가 있는 방은 나에겐 충분한 휴식처가 되어 주었

다. 차가운 물로 샤워를 두 번이나 했는데도 온몸에서는 열기가 후끈후끈

오르고 있다. 모기장을 치고 대충 잠자리에 들었다. 밤새 더위와 목마름

과 모기와의 씨름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바람을 쐬러 밖에

나갔으나 달빛 아래 모기한테 고생만 당했다.




5/13 룸비니에서 관광

새벽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나가니 스님 한 분이 친절하게 맞이해 주신

다. 룸비니에는 택시도 없고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대여할 수도 없다. 평지

여서 바람은 조금 있지만 나무 그늘이 별로 없어서 떼라이의 강한 태양을

피할 수 있는 곳이 없다. 간혹 지나가는 자전거 릭샤를 어제 타 보았지만

자신보다 덩치가 몇 배나 큰 나를 뒤에 태우고 릭샤를 모든 자전거 릭샤꾼

은 나를 룸비니 입구에서 대성석가사로 태워주고는 온몸에 땀에 젖고 지쳐

서 나의 고맙다는 말에 대답도 하지 못하고 힘겨워 했다. 스님에게 자전

거 이야기를 꺼내니 스님이 자전거를 빌려 주신다. 자전거를 타고 룸비니

의 유적지를 차례차례 둘러보기 시작했다. 룸비니의 유적지는 무척 넓은

영역에 있지만 대부분이 마야데비 사원을 중심으로 모여 있어서 모두 구경

하는데는 두시간 정도가 걸렸다. 부처의 어머니인 마야 데비는 BC563년에

룸비니에 오게 되었다. 마야 데비는 만삭이었고 kapilavastu에서 그녀의

친정인 Dewadaha로 가던 중에 룸비니에 들렀는데 룸비니에서 경치를 즐기


고 연못에서 목욕을 하던중 통증을 느껴 부처님을 태어나게 했다고 한

다.  마야 데비기가 목욕한 신성한 연못과 보리수 나무앞에서 사진 한

컷! 주변의 유적지를 구경했다.


구경을 마치고 나니 룸비니에서 더 이상 구경할게 없고 마땅히 먹고 쉬고

마실 곳이 없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다시 포카라가 그리워 졌다. 8시간이

면 포카라에 도착 할 수 있으니 적어도 초저녁에는 포카라의 밤을 즐기고

내일 오전에는 오토바이를 빌려 포카라의 가지 못한 사랑곳이나 몇몇 동굴


을 구경할 수 있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해 질 때 쯤, 갑자기

한가롭다 못해 지겨운 평화가 있는 이곳이 마음속에 편안하게 다가온다.

하루 더 머무르고 마음의 쉼을 업고 내일은 치트완 국립공원이 있는 사우라

하 마을로 가기로 결심한다.


밤새도록 개 짖는 소리와 함께 소동이 있었다. 너무 시끄러워 한숨도 자

지 못했다. 아침에 스님께 물어보니 늑대, 여우, 개 자칼이 영역 다툼을

하는 소리이고 야생동물에 물려 많은 사람들이 죽기도 한다고 말씀 하신

다.
이전: 행복의 조건..
다음: Re: 네팔 여행기 1 부 입니다
2003/07/26(13:34)
CrazyWWWBoard 2000

Reply Modify Delete Forward Prev Next Post List